2014.06.02
법궤의 효력 (2000. 11. 26 주일설교)

법궤의 효력


오늘의 말씀/삼하15:24-29

(24)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고하는 기별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룻터에서 기다리리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니라



인생은 더하기 인생과 곱하기 인생이 있습니다. 물론 빼기 인생도 있지만 이것은 아주 못난 삶이기 때문에 접어 두기로 합니다. 2+2는 4입니다. 2x2도 4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으나 저렇게 믿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3은 더하기 곱하기가 차이가 많이 납니다. 10은 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더해 가면 나중에는 천문학적 숫자의 차이가 납니다. 평상적 믿음의 생활과 헌신적 삶의 차이는 이 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에 순간에 그냥 평상적인 믿음을 보이는 사람은 더하기 삶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순도 높은 믿음을 보이는 사람은 곱하기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은 곱하기의 삶의 비결을 다윗을 통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인생 말년에 친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합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급보를 전령에게 전해들은 다윗은, 압살롬이 대병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황급히 도피 명령을 내립니다. 온 예루살렘 백성과 고관들과 함께 황망히 예루살렘 성을 떠나는 다윗의 행렬은 통곡의 바다가 됩니다. 다윗은 맨발로 기드론 시내를 지나 감람산을 넘고 광야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때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이 피난길에 같이 나섭니다. 이걸 본 다윗은 고뇌에 찬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 성안에 도로 안치해 놓으라고 합니다.

"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 (삼하15:25-26)

“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법궤가 어떤 법궤입니까.다윗과 언약궤와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즉위 초에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옵니다. 그때는 삼만명을 동원했습니다. 1차 운반에 실패하고 2차 운반에 성공하여 다윗성으로 모셨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법궤가 옮겨 올 때에 벌거벗고 춤을 추었습니다. 70년 이상 기럇여아림에 방치된 법궤를 모셔온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던 법궤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임재하시는 법궤가 아닙니까? 다윗은 애지중지하던 그 법궤를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면서 이제 두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주 다윗의 깊은 신앙 고백이 배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법궤를 피난길에 함께 메고 가면 세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겁입니다.
첫째는 법궤를 메고 가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구나’ 이래서 불안한 마음이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둘째는 쫒겨나 유랑하는 정치적 패배를 당한 왕에게 이 법궤는 정통성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전력의 열세에 놓인 불안한 다윗 진영에서 이 법궤는 승리를 보장해 주는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궤는 가나안 땅을 들어설 때 요단강을 가른 이후로 무수히 영험한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장점들을 다 포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중심을 순수하게 믿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렇게 천금보다 더 귀한 이 법궤를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메어 가라고 지시를 하는 겁니다. “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법궤의 위력도 알고 있었지만 믿음이 없을 때 법궤의 무서움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 중심에 진정한 믿음이 없이 법궤를 이용하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한 전례를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너무 강해 이스라엘은 4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은 법궤를 실로에서 부랴부랴 가져옵니다.

"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 (삼상4:3)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케 하자! 언약궤를 구원의 방패막이로 사용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패배하면 분명히 패배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의 패배가 아닙니다. 바로 믿음의 패배입니다. 믿음의 사람의 패배는 믿음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연단이든 훈련이든, 아니면 죄악의 결과이든 불신앙의 결과이든 반드시 믿음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물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때 이미 불신앙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고도 다급해 지니까 법궤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불신앙의 마음으로 법궤를 앞세운 전투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삼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깁니다. 이때에는 그 영험한 법궤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 아니라 그냥 하찮은 아카시아 나무 상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다윗이기에 위기의 순간에 법궤를 두고 가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믿음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순도 높은 믿음입니다. 급할 때가 되야 믿음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시련의 시기에 믿음은 증명이 됩니다. 큰 병을 당했을 때,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고난에 빠질 때, 고통의 기간에 믿음은 증명이 됩니다. 대개 위기를 당할 때 우리는 종종 사람을 원망하고, 얕은 꾀를 씁니다. ‘하나님, 이 고비만 우선 넘기고 보십시다. 이 고비만 넘기고 문제가 잘 해결되고 나면 예전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잘 대접해 줄께요. 잠잠해 지면, 이 문제만 해결되면, 평상시처럼 그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곧이 곧대로 행할께요.’ 이럽니다. 만약, 다윗이 이런 생각이였다면, 진작에 사독에게 특별명령을 내려서 무장 호위를 붙이고 법궤를 끌어안고 나가는 얕은 방책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삼하15:25-26)

여기서 다윗은 절대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의 의향이 중요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25절에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이 법궤도 다시 볼 것이요, 예루살렘도 다시 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줄 만한 믿음이 되면 그런 자세가 되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제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법궤는 남겨두고 믿음을 가져가야 합니다. 법궤를 남겨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법궤의 위력에 의지하지 않고, 이제는 정말 100%로 믿음에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법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아닙니까? 잘 보세요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입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은 법궤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나타날 때에는 여지없이 성막 위에 구름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십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법궤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떠나서는 임재를 못하는 분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다 인간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더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이건 법궤를 두고 벌어진 이스라엘의 여러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도구가 없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순도를 보여야 할 때입니다. 위기에는 더 큰 믿음의 순도가 필요합니다. 고난의 시기에는 더 철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순도를 최고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효력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법궤 안에 하나님이 갇혀 있을 리 없지요. 법궤는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성전도 이미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어떻게 법궤가 요단강을 갈랐습니까? 이미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굳이 법궤를 앞세우지 않아도 그때의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밟고 건넜을 것입니다. 강물을 가르는 것은 지팡이도 되고 법궤도 됩니다. 그건 그냥 도구일 뿐입니다. 진짜는 마음에 있습니다. 가슴 속에 있는 믿음이 진짜입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이미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미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이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 그것이 다입니다. 성전은 삶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내 삶의 중심에 성전이 있느냐? 이것이 이미 마련되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내 마음 속에, 우리 가정에, 이미 하나님이 중심으로 임재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 성전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이미 내 마음 속에 참된 예배가 자리 잡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 중심에, 내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 예배가 없다면 성전을 아무리 화려하게 지어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콘크리트 조각일 뿐입니다. 성전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마음에 없으면 겉으로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법궤를 열 개씩 끌어안고 있어도 그것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 예배가 없으면 성전을 몇 십만평으로 으리으리하게 지어도 그건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까닭에 우리는 이제 허깨비는 놓고 알맹이를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법궤는 놓고 믿음을 안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적인 계산은 놓고 하나님의 신뢰를 안고 가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 중심에 있을 때 법궤는 효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을 때에라야 인간적인 계산과 노력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믿음은 증명이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믿음은 드러납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지지부진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엄청난 위력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더하기의 삶을 살든 곱하기의 삶을 살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대의 몫입니다. 순도 높은 믿음은 순도 높은 기적을 생산합니다. 이제 그대의 선택이 믿음의 방식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생의 위기 앞에서 더욱 순전한 믿음으로 행복의 전환점을 만드는 영광과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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